[칼럼] 고종의 파천 길을 되풀이할 것인가

-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 前 국립외교원장

1885년 영국 해군은 돌연 거문도를 점령한다. 교과서에서 가르치지 않는 조선 패망의 발단이 된 사건이다. 당시 중국과 일본이 공히 강력한 러시아의 남진을 큰 위협으로 보고 전전긍긍하던 시기였다. 청나라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에서 보듯이 러시아 남진을 막기 위해 속방 조선이 일본,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도록 하고,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보내 외교 전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묄렌도르프는 자신을 고용한 청을 배반하고 조국 독일의 이익을 챙겼다. 숙적 러시아가 유럽보다 아시아에 힘을 쏟게 하려는 간계였다.

그는 고종과 왕후 민씨에게 중국과 일본이 두려워하는 러시아와 손을 잡는 것이 조선이 살길임을 알렸고 솔깃해진 고종은 조선을 러시아가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그토록 바라던 부동항을 제공한다는 조·러 밀약을 수용한다. 밀약을 알게 된 영국은 러시아 함대가 탐내는 거문도를 선제 점령한다. 당시 패권국 영국은 신흥 강국 러시아의 바다를 향한 남하를 철저히 봉쇄하여, 러시아와 100년에 걸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에 번번이 봉쇄당한 러시아는 발칸, 아프가니스탄, 인도를 거친 동진 끝에 막다른 지점 한반도에서 영국과 충돌했다. 영국 힘에 눌린 러시아는 조선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10년 뒤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조선 왕 스스로 자국 땅에서 러시아 공관으로 망명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일어난다. 아관파천이다. 러시아에는 한반도가 넝쿨째 굴러들어 온 셈이었다.

조선은 패권국 영국의 역린을 건드렸다. 조선은 강대국에 휘둘리고 지정학적 추세도 못 읽고 위협의 본질을 망각했다. 불과 10년 전 거문도 사건의 경험에서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했다. 역내 국가들이 러시아 위협에 대처하고자 했는데, 조선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은 러시아 남하를 막는 데 조선이 협력한다면 적극 지원할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전달했지만, 조선은 종주국이 청임을 들어 교섭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는 연대에 동참했다면, 최소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반면 일본은 국제 역학 관계와 지정학적 추세를 보면서 러시아의 위협을 파악했고 철저히 영국에 붙었다. 영·일 동맹은 일본에 러·일 전쟁 승리와 조선을 식민지로 얻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중국이 러시아를 대신하는 대륙의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면서 패권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중국은 미국 포위망을 뚫고 태평양으로 진출하려고 한다. 중국은 차근차근 우리를 중국의 일부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한다. 고구려를 필두로 한반도 국가들을 중국 지방정부로 보면서 한국사를 중국 역사로 둔갑시키고, 한복에서 김치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화로 만들고 있다. 외교 의전에 있어서도 한국을 홍콩이나 마카오와 같은 대우를 한다. 과거 전통적인 종주국과 속방의 관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중국이 지역 패권을 갖게 되는 날, 우리의 위상은 어떠할까?

패권국 미국은 아시아를 중국이 지배하는 것을 막고자 군사력 동원은 물론 동맹국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영·불의 항공모함이 동아시아에 전개되고 역내 국가와 안보상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보다 강한 일본, 인도조차 미국과의 전략적 연대를 강화하고, 우리만큼 대중 경제 의존도가 높은 호주나 대만도 이 연대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본이 인도·태평양 전략과 쿼드를 주도하는 모습은 100여년 전 영·일 동맹을 연상하게 한다. 반면, 우리는 한·미 동맹의 분량을 줄이고 그만큼 중국을 중시하는 것을 균형 외교라 하고 미·중 냉전에서 기껏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지혜인 양하고 있다.

고구려가 당에 멸망한 이래, 우리는 한 번도 역사적 대전환기에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다. 주위에 센 놈이 나타나면 힘으로 복속당하든지 알아서 추수해왔다. 한국은 G7 규모의 선진 민주 국가이며, 동맹 없이 표류하던 조선과 달리 강력한 동맹도 있다. 미·중 냉전의 핵심인 하이테크 경쟁을 좌우하는 반도체에 있어 한국은 강력한 우위도 갖고 있다. 최악의 지정학 조건이지만 발상을 전환하면, 한국은 미·중 경쟁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고 상당한 지렛대를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갖고 있다. 한국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다시 맞붙는 대전환의 위기에서 스스로 극복하는 힘을 보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위기를 극복한 나라와 실패한 나라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결국 지도자의 자질이다. 강대국에 휘둘려 추세도 못 읽고 위협의 본질을 망각하고 우왕좌왕하던 혼군 고종의 아관파천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선일보, 2021-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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