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한·일 정상 서한 오간 지금, ‘양보 이니셔티브’ 추진해야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국제학연구소장, 신각수 前 주일대사 외

16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내각의 출범을 계기로 경색된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18일 ‘한일비전포럼’에서 참석자들은 “스가 총리가 한·일관계를 풀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11월 한·중·일 정상회의 전에 물밑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마침 포럼 다음날, 스가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려운 문제를 극복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구축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서한을 보내왔다. 앞서 문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자”는 취지의 축하 서한을 보낸 지 사흘 만의 답신이다. 참석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양국 갈등의 시발점인 강제징용 배상문제에 관해선 우리가 ‘양보의 이니셔티브’를 발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 발제문 요약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파벌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무소속을 중심으로 30명 이상의 ‘스가그룹’이 있다. 사실상 파벌이다. 아베 신조는 1년 전부터 스가를 후임 중 한 명으로 점찍었다. 스가는 7년 9개월 동안 관방장관으로 아베와 손발을 맞췄기에, 당장 아베 정권과 반대로 가거나 정체성을 수정하기는 힘들다. 내각 인사에서 아베 내각의 8명을 유임시킬 정도였다.

스가 내각은 행정개혁과 디지털 경제 혁신을 핵심과제로 꼽았다. 따라서 고노 다로 행정개혁 담당상과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전임자로서 아베의 잔여 영향력은 클 것이다. 한·일 관계에서도 그의 역할을 잘 활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스가 정권이 내년 9월까지 아베의 잔여임기를 채우는 위기관리 내각이 될 수도 있겠지만, ‘1+3년’ 정권도 가능하다. 지금으로선 자민당 내 스가연합을 깰 구조가 형성되기 어려워서다.

스가는 외교 문외한이 아니다. 최장수 관방장관을 지내면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통해 주요 정보를 취합했고, 한·일 현안에 대한 숙지도가 높다. 또 ‘흙수저’라서 명예에 관한 집착 덜하다. 우파단체인 ‘일본회의’에 참여하지만 중심인물이 아니다. 이념 성향도 옅고 실용적이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에 나선다면 그도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관건은 올해 말~내년 초 일본기업 압류자산 현금화가 닥치는 걸 막을 수 있느냐다. ▶사법적으로 현금화를 유예할 수 있는지 ▶문희상 안에 이은 윤상현 안처럼 특별입법으로 강제징용 문제를 풀 수 있는지 ▶정부가 대위변제한 뒤 구상권 청구하는 게 가능한지 ▶국제법적 협의·중재·재판 회부가 가능한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 이 모든 게 실패할 경우의 위기관리 대책도 필요하다.

한·일 관계 복원에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스가 정권이 이어지든 다른 정권이든 일본에서 새 내각이 출현하고, 문재인 정권 후반기에 안 되면 차기 정권에서 타협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스가는 냉철한 포퓰리스트로 평가된다. 가치보다 비용을 따진다. 아베 노선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선 ‘아베 2.0’이지만 스가의 정치 역정과 가치관을 고려하면 ‘아베 1.5’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한·일 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 기업의 압류 자산 현금화를 막으려면 피해자 설득에도 나서야 한다. 신뢰를 주면서 구체적 행동과 입법을 통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자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스가는 술도 마시지 않는 ‘24시간형 정치인’이다. 그만큼 실무형 정치인이다. 다만 코로나19 방역, 내수경제 활성화와 내년 7월 도쿄 올림픽 성패에 따라 1+3으로 갈지, 1년으로 끝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성과를 내지 못해 지지율이 20% 이하로 떨어지면 어려운 길을 갈 수도 있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아베 내각 최장수 관방장관 기록을 세웠던 만큼 당분간 ‘아베 없는 아베 내각’을 유지할 것이다. 특히 스가는 관방장관으로 내치뿐만 아니라 외치에 관여했고,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는 아베가 소극적 자세를 보이자 스가가 관여했을 정도로 한·일 현안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어떤 안을 가지고 일본에 제시하느냐가 관건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스가 총리야말로 ‘한국이 지나치다’라고 생각하는 보통 일본인이고, 풀뿌리 내셔널리즘의 전형이다. 일본 총리가 바뀌었으니 일본이 먼저 움직여달라는 접근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우리가 대안을 만들어 일본이 대화에 나오도록 끌어내는 것이 맞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1+3’으로 가기 위해서는 스가 총리가 상당히 많은 실적을 쌓아야 한다. 3년 연장은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스가 정권 아래 개선의 여지는 있다. 현금화를 유보할 지혜를 내서 일본과 물밑협상을 해야 한다. 수출규제 문제, 코로나 방역 협력, 인적교류 재개 등 3개 이슈의 틀로 협상을 시도해나간다면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석숭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일본 입장에선 전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대화의 문이 열려있다고 하는 것은 진정성 있게 느끼지 않는다. 한국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면서 대화를 하자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거다. 일본 기업은 징용 보상 의지가 있는데 마치 일본 정부가 이를 막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본 정권이 기업인들의 거부감에 편승하고 있다.

▶최상용 전 주일 대사=한국이 양보의 이니셔티브를 취할 최적기다. 양국 정부가 관계를 악화해선 안 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그 기회는 연말 한·중·일 정상회의다. 양자 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코로나19 방역의 3국 협력을 중심 의제로 제안한다면 일본은 물론 중국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 회장=한·중·일 정상회의가 현시점에서 굉장히 중요하지만 스가 총리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현금화가 이뤄지면 스가 정권에는 리스크가 크다. 일본이 회담에 오도록 만들 신뢰 조치가 필요하다. 또 지소미아는 한·일관계의 어려운 환경과 논란 속에서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2021년 후반기에야 한·일관계 경색의 타개가 가능하다면, 우리 정부는 임기가 몇 개월 남지 않은 상황이 된다. 아무것도 안 되고 다음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아베 정부가 지나갔다는 점을 변화의 빌미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만일 미국에서 바이든 정부가 들어선다면 워싱턴으로부터 한·일관계 개선의 압력도 조금 더 강해질 수도 있다.

▶이근관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한·일 관계를 양자 관계가 아닌 미·중 경쟁과 북한의 존재를 포함해 다자관계 틀 속에서 생각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미국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동아시아에서 미·중 전략적 경쟁은 계속될 것이고, 북한은 항상 존재한다.

▶신현호 대한변협 인권위원장=강제징용 판결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최근 대법원 판결의 트렌드다. 인혁당 사건 및 광주민주화운동 등에서도 피해자에 위자료를 지급하게 했다. 그래서 현금화는 사법절차에 따라 진행되기에, 여론에 의해 멈출 수는 없다. 입법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일본도 마지못해 협상에 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20대 국회에서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법안을 냈고 21대 국회에서 양정숙 의원과 윤상현 의원 법안이 상정돼 있다. 야당의 리더십도 중요한데 현 정권에서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적폐청산 대상으로 삼은 게 야당으로선 트라우마다. 여야를 떠나 한·일관계 갈등과 피해 배상 문제를 함께 해결하겠다는 초당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한국 정부가 한·중·일 정상회의를 전제로 그 전에 적극적으로 물밑대화에 나서 이니셔티브를 취할 때다. 사법절차에는 개입할 수 없으니 입법절차를 통해 풀어가는 게 합리적이다. 문희상 안을 모태로 변형 안을 갖고 한·일간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한·중·일 정상회의 전 한두 달의 기회를 놓치면 스가 총리도 관계 개선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중앙일보,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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