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親韓’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국제학연구소장

광복절 기념식 석상에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우리나라’가 대신 올라왔다. 광복회장은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구도로 지금의 세상을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작금의 세태를 보면 국제사회의 보편 논리와는 거리를 두면서 민족 화합을 위해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게 낯설지 않을 지경이다. 민족의 통합이 어떤 가치보다도 앞선다는 ‘민족지상주의’가 꿈틀거리고 있다. 한국의 안보와 경제 성장을 견인해 온 ‘국제사회와의 연대’는 코너에 몰리는 양상이다. 민족 재결합을 지상 명제로 삼은 나머지, 북한을 우선시하는 경향마저 엿보인다.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내세우다 북한이 시큰둥하자 슬그머니 내려놓고, 북한이 제재 완화가 우선이라니까 국제사회를 돌면서 북한을 감싸며 제재를 풀어줘야 한다고 외쳤다. 미국 눈치 보느라 남북 협력 사업 하나도 제대로 못 추진한다고 북한이 비아냥대자, 독자적으로 북한과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최근에는 북한 기업의 한국 내 영리 활동 허가 방안이나 북한에 대한 의사지원법까지 거론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백선엽 장군은 친일로 몰아 생채기를 내면서, 독립운동은 했지만 북한 정권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던 김원봉을 서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스스럼없이 나온다. 김일성을 서훈하자는 말이 안 나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어리둥절하다.

북한을 적대시하자는 게 아니다. 북한 주민도 우리의 민족이니 언젠가는 한민족 통합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버릴 수 없는 꿈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비뚤어져 있어서 마치 북한이 민족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선전 선동하는 것은 한국의 자기부정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포기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가치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선열이 조국에 뼈를 묻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자유를 존중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점에 있다. 국제사회도 존중하는 보편적 가치와 체제를 민족지상주의를 위해 훼손해서는 안 된다.

북한과도 협력할 수 있는 것은 과감히 협력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 핵을 없애는 노력에 우리 스스로 적극 나서야 한다. 북핵은 미·북 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 문제다. 비핵화 없는 평화는 ‘위장된 평화’이거나 ‘착시 현상’일 뿐이다. 북한과 협력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는 늘 챙겨야 한다. ‘북한 우선주의’를 내려놓고 ‘대한민국 우선주의’가 중심축이어야 한다.

일본에 대해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는 반일은 국가 정체성의 일부다. 식민지시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광복 75년이 지난 지금, 친일 세력 청산에 몰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지금도 누군가 친일 반민족 부역(附逆) 행위를 하고 있다는 주장은 허상에 가깝다. 21세기의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며, 한국도 더 이상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아직도 친일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은 ‘민족해방(NL)’이라는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표다.

일본과 협력하자고 하면 친일이라 치부하고, 중국이나 북한과 가깝게 지내자고 하면 민족주의자라는 건 비뚤어진 인식이다. 일본의 치졸한 행위에 대해 팔을 걷어붙일 기개가 있다면, 중국의 오만과 불손에 대해서도 피가 끓어야 한다. 일본은 늘 반한적이고 중국은 늘 친한적이라는 전제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한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일본과도 중국과도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주변국을 당당하게 대할 위풍과 품격이 있어야 상대도 우리를 존중한다.

대한민국은 전쟁을 겪으면서까지 자유를 지켜냈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온 힘을 기울여 가난에서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산업화 세력이 못 이룬 민주화를 1980년대에 달성했고, 민주화 과정에서 글로벌화에 뒤처진 몫을 외환위기 이후에 당당히 이뤄냈다. 지난 성과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좋지만, 마치 민족정기와 국가 정통성이 바로 서지 못한 것처럼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내부 분열만 조장하는 것은 자학적이고 치졸한 선택이다. 자기 나라를 스스로 아끼지 못하는 나라는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한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가슴에 새기고 ‘친한(親韓)’부터 하는 게 먼저다.

[문화일보, 2020-09-03]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009030103301100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