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금은 경제적·외교적 대북 압박에 치중할 때

신각수 前 주일대사

지난 2년 반 북핵 교섭으로 우리 사회에 고조됐던 평화 환상은 북한의 공격적 대남 비난과 도발로 인해 거품이 빠지고 있다.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이룩한 남북 관계 진전과 합의도 과거 남북 관계 패턴을 되풀이하고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10월 스톡홀름 실무회담도 성과 없이 끝난 뒤 새로운 움직임 없이 북핵 시계는 자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이번 교섭이 북한의 사실상 핵무장 국가화를 막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 교착 상태는 뼈아픈 현실이다.

무엇이 잘못됐나? 그간의 교섭 경과와 최근 발간된 존 볼턴 전 미 국가안보보좌관 회고록을 분석하면 여러 문제점이 발견된다. 가장 큰 문제는 비핵화 교섭에 임했던 북한이 실제로는 완전한 핵 폐기 의사가 없었다는 점이다. 북한은 하노이 회담에서 핵 능력의 일부에 불과한 영변 핵시설 폐기를 대가로 핵심 대북 제재 해제를 얻는 데 집착했다.

교섭 과정 내내 북한은 군사·경제 병진 노선의 연장선상에서 핵 능력 유지와 제재 해제를 일관성 있게 추구했다. 결국 비핵화 핵심 요소인 ▶비핵화 정의 ▶포괄적·실효적 로드맵 작성 ▶신고·검증 등에는 전혀 손도 못 댔다. 북한은 가장 두려워하는 미국의 군사력 사용과 중국의 식량·석유 지원 단절을 북·미 교섭과 북·중 관계 강화로 막은 만큼, 핵 군축 입장에서 체제 생존에 필수라 여기는 핵·미사일 능력은 온존시키면서 부분적 제재 해제를 모색하는 전략으로 임했다.

미국은 개발 중인 것보다 이미 개발한 것을 포기시키는 게 훨씬 어렵다는 점을 간과했다. 이로 인해 북한을 너무 얕잡아 봐 교섭 준비가 부족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 정치적 홍보에 치중했다. 북한이 2017년 도발 모드에서 2018년 교섭 모드로 전환한 것은 미국의 강한 군사 압박, 미·중 협력에 의한 체제 변경 위협, 국제사회의 제재 강화를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초기의 유리한 상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다녔다.

또 북한이 염원해온 북·미 정상회담을 지렛대로 정상회담에 앞선 실무회담으로 충분한 정지 작업을 했어야 했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추상적 합의로 끝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싱가포르 회담에서 하노이 회담의 실패는 예견됐다.

교섭 과정에서 미국은 교섭 목표가 9·19 공동성명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폐기(CVID)’에서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로, 다시 ‘완전한 비핵화’로 약화됐다. 비핵화 시기도 볼턴의 ‘1년’에서 폼페이오의 ‘2년’으로 계속 후퇴했다. 결국 북한의 핵 프로그램 완성이 가까워 일정 시간 내 의도한 최대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 교섭이 무의미해지는 ‘외교에서의 시간·기술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2018년 북·미 교섭의 물꼬를 튼 한국도 교섭의 중재자 역할에 치중하고, 남북 관계를 앞세운 나머지 비핵화 진전→남북 관계 개선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한국은 당사자이지만 교섭에 직접 참여하지 못 하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대북 교섭의 구체적 전략과 세부 유의사항을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고 ‘국제사회 대 북한’의 틀을 만들어 교섭 내내 북한에 압박이 가해지도록 했어야 했다. 북한에 대해 핵 폐기 없이 경제 발전은 없으며 북핵 폐기 의도를 행동으로 보여줄 로드맵 작성과 검증이 필수임을 설득해야 했다. 북한이 꿈꾼 스몰 딜은 다행히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우리가 앞장서서 그 가능성을 차단했어야 했다.

북핵 교섭은 코로나19와 미국 대선의 안개 속에 갈 길을 잃었다. 최근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UAE) 국교 정상화 합의와 같이, 현재 대선 전망이 불리한 트럼프 대통령이 종래 행보에 비추어 ‘10월 깜짝쇼’(October Surprise)를 시도할 수 있겠지만, 그 경우 ‘겉치레 비핵화’로 끝날 우려가 크다. 북한이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미국도 코로나19 대응과 대선으로 여유가 없다는 점에서 내년 상반기까지 현상 지속(muddle through)의 가능성이 높다. 또 미국이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고 대선 후 북·미 협상을 재개할 때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이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전체 국면을 철저히 분석해 현실적 대북 전략을 짜야 할 시점이다. 북한에 핵·미사일 능력은 체제 생존이자 정권 정당성의 보루인 만큼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대외 압력이 가해지지 않는 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군사적 압력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유일한 수단은 제재와 국제사회의 외교적 압력밖에 없다.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행동으로 확인하기까지는 대북 제재가 실효적으로 작동하도록 국제사회의 단결을 꾀해야 한다. 제재 때문에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대북 경제 지원은 불가능하므로 남북 관계도 제약이 불가피하다. 메아리 없는 일방적 대북 협력에 치중해 비핵화라는 전략 목표를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

외교는 희망적 관측이나 상대방 선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남북 관계는 북핵 문제의 해결 전망이 생기면 자연스레 개선될 것이므로 당분간 ‘대북 전략적 인내’가 필요하다. 지금은 북한이 핵·경제 병진 노선으론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이를 위해 제재의 실효적 작동에 의한 경제적 압박과 국제사회의 일치된 대응을 통한 외교적 압박에 치중하는 한편, 깊어가는 미·중 대결 속에 북핵 폐기를 위한 양국 협조를 끌어내는 데 외교력을 집중할 때다.

[중앙일보,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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