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민족·이념·과거 과잉, 한국 외교 옥죄고 국가 생존 위협

신각수 前 주일대사

우리 외교가 기축인 한·미 동맹에서 주변국 관계와 남북 관계까지 불안정해 사면초가 형국이다. 국제 환경 악화 탓이 있겠지만, 우리 외교에 내재하는 문제도 영향이 있다. 우리가 혼돈과 초불확실성의 대전환기에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려면 정부와 다양한 국내 행위자들이 함께 우리 외교에 낀 7대 과잉 거품을 빼내 탄탄한 외교력을 구사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첫째, 민족 과잉이다. 분단국으로서 민족의 시각은 불가피하지만, 민족 과잉은 ‘닫힌 민족주의’로 흘러 외부 환경에 관한 객관적 인식을 어렵게 해 외교를 그르친다. 북한은 연계 대상이자 가장 큰 군사 위협인 이중적 존재다. 북핵 문제 해결과 북한의 개혁·개방에는 ‘우리끼리’라는 감성적 구호보다 동맹국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협조가 필수다. 우리가 대북 관계를 앞세워 북핵 폐기 수단인 실효적 제재 체제의 부분 해제를 선도하는 것이나 비핵화 교섭의 지렛대로 써야 할 종전선언에 집착하는 것은 민족 과잉의 산물이다.

한편 국제사회에서 지역·가치·이해·종교·문화에서 소속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한국은 동맹·동반자를 소중한 외교 자산으로 잘 관리해야 한다. 지난 9월 초 한국 네티즌들이 필리핀 인플루언서의 문신이 욱일기를 연상시킨다고 문제 삼자, 필리핀인들이 ‘한국을 취소한다(Cancel Korea)’는 해시 태그로 강하게 반발한 사건은 민족 과잉의 부작용을 보여준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세계로 열린 시각은 필수다.

둘째, 이념 과잉이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19 사회통합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갈등 유형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이념 갈등이다. 이념 과잉은 사회 분열과 진영 대립으로 초당적 외교를 어렵게 하고, 확증편향으로 전문가를 경시하며, 현실과의 괴리로 실용 외교를 막는 문제가 있다.

외교 사안에 이념의 색안경이 덧씌워지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대로 보려 해 잘못된 판단으로 이끈다. 북한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해상 표류 공무원 사살 등 지속적 도발과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명백한 역사 왜곡을 외면한 느슨한 자세는 이념 과잉의 소산이다. 지정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우리에게 이념에 따른 경직된 외교를 할 여유는 없다.

셋째, 과거 과잉이다. 20세기 불행했던 근대사와 관련된 과거사 문제는 피해자가 생존해 있고 우리 정체성과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과거 과잉은 피해자 의식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옥죄어 발전을 막는 역기능이 있다. 독립 후 75년, 국교 수립 후 55년이 지났는데도 ‘토착 왜구’ ‘죽창가’ 같은 퇴영적 역사의식은 외교 반경을 제약하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엇박자를 낸다. 당면 현안인 강제동원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협력적으로 타결해 대전환기 우리의 전략 공간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대일 관계의 조속한 회복에 힘써야 한다. 역사 화해는 역사 연구·교육을 중심으로 중장기적으로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또 현재와 미래 협력을 통해 과거를 치유하는 역발상도 중요하다.

넷째, 정치 과잉이다. 어느 국가나 국내 정치적 고려를 외교에 반영하지만, 정치 과잉의 외교는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초연결 사회는 국내 문제의 국제화와 국제 문제의 국내화를 촉진하였다. 그만큼 국제적 시야에서 국내외 문제를 조망하고 대응해야 하는데 국내 정치의 프리즘을 통한 분석·대응은 국제 사회의 규범·약속·기준에 반하거나 외교적 실수를 가져온다. 국제 환경을 지배하기 어려운 우리와 같은 중견국은 국내 정치의 연장선에서 외교를 할 여지가 별로 없다. 한편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을 대상으로 외교정책과 여론을 부단히 동조화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다섯째, 단순화 과잉이다. 친미-친중, 친중-친일, 친북-반북 등 우리 사회의 흑백 논리는 2분법적 선택의 인식이 강해 외교에 부담이 된다. 혼돈의 대전환기는 복잡계로서 다양한 선택지가 있으며 초연결사회의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하므로, 실제 외교는 고차 방정식을 풀어야 할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인도·태평양 구상은 참여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분야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일대일로에 참여하면서 쿼드 플러스에도 참여할 수 있다.

여섯째, 감성 과잉이다. 영국 외교관 해럴드 니컬슨이 명저 『외교』에서 지적했듯 이상적 외교에는 침착함이 중요한 덕목이다. 감성에 휩쓸리면 불필요한 말이 늘어나고 냉정한 상황 판단이 힘들어진다. 정부와 국회의 고위 인사들이 북한의 핵 개발이 미국 탓이라거나, 유엔사령부를 남북 관계의 장애물이라거나, 중국의 핵우산을 거론하는 것은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거니와 동맹 관리에 잘못된 인식을 가져와 국익을 손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명분 과잉이다. 우리 사회는 유교 전통의 영향과 약소국 의식으로 실질보다 명분·체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고 외교에도 종종 투영된다. 국가 위신도 국익의 일부지만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전략 목표 달성이 우선돼야 한다. 우리가 미·중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거나, 별다른 외교 이익도 없이 천안문 광장에서 눈에 띄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이번 대선으로 미국이 더욱 분열된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 변화가 예상되고, 코로나19의 2·3차 유행으로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혼란은 당분간 지속할 전망이다. 북한의 도발 위험이 커지고 미·중 대결은 더욱 첨예화될 것이다. 빨리 우리 외교에 낀 거품을 빼고 포괄적이고 창의적이며, 신뢰감 있고 일관되며 조화로운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중앙일보, 2020-12-01]
https://news.joins.com/article/23933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