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文정부 늦었지만 ‘탈북’ 할 때다

-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정권 재창출이 지상 과제인 현 집권층에 ‘정책 실패는 곧 정권 실패’라서일까? 국가적 명운이 달린 정책들은 대통령의 바람이나 고집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건데, 분명한 정책 실패라도 인정하고 책임지는 일이 없다. 필요한 건 정책 전환인데, 정책의 효과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단다.

문재인 정부의 ‘기승전북(北)’ 식 외교·안보 정책은 오래전에 좌초됐지만, ‘북바라기’는 꺾일 기미가 없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김정은의 대변인이라는 오명(汚名)을 감수하며 문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의 진정성을 설파하면서 대북 제재 완화를 일관되게 요구해 왔다. 그러나 배은망덕하게도 북한은 미국과 협상 교착의 화풀이를 한국에다 해댔다. 어떻게든 대북 물꼬를 터 보려는 문 대통령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국제적 공동 목표를 뒤로한 채 ‘할 수 있는 걸 하자’며 지난해 8월 자주파 외교·안보 진용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국제사회와 엇박자를 내면서 방역 협력과 경협 등 비현실적인 대북 제안을 했다.

임기 내내 친일 프레임과 토착왜구 몰이로 국가 이익보다 당파적 이익을 앞세웠던 집권층이 지난해 11월 갑자기 한·일 관계의 회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김정은이나 시진핑(習近平)의 한국 방문이 힘들어지자 오는 7월 도쿄(東京)올림픽에 김정은을 불러서 남·북·미·일 4자 정상회의를 하려는 구상을 한 것이다. 북한을 너무 잘 안다는 청와대가 미·북 협상 성사 전에 이러한 구상이 실현돼 비핵화 물꼬가 트일 거라고 진짜 믿는 걸까? 바람이었든 착각이었든, 남북 정상 회동 직후 80%를 웃돌던 대통령 지지율에 대한 향수가 컸던 것 같다.

지난주 제8차 노동당대회에서 김정은은 무려 36차례나 ‘핵’ 발언을 하며 선군정치 강화를 천명했다. 그리고 오는 20일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출범에 앞서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온갖 무기들을 열거하며 미국에 맞서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에 대한 위협 평가가 필요할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경제 파탄과 주민 불만을 국방력으로 덮기 위한 허세다. 김정은은 문 정부의 대북 순애보에도 답변했다. 인도적 지원이나 경협과 같은 비본질적 문제에는 관심 없으니 첨단 군사장비 반입과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무기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정정당당한 자주권이라면서, 한국은 한·미 동맹을 파기하라는 적반하장이다.

중요한 것은 문 정부의 판단력과 대응력이다. 문 대통령은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여전히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굳건하다고 평가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선 김 위원장의 어떤 평화에 대한 의지, 대화에 대한 의지, 그리고 비핵화에 대한 의지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앞서 11일에는 핵무기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막연한 말로 신년사를 갈음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12일 끝난 당대회 때 “강력한 국방력으로 통일을 앞당기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정부·여당 인사들은 북한의 잇단 강경 행동과 원색적 비난의 속뜻이 과감한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우긴다.

현 정부는 최대의 외교 치적으로 ‘전쟁 없는 한반도’를 이뤘다고 내세웠으나, 남북관계가 교착되면서 대북 화해라는 정치적 성과에 집착하는 조급증에 걸린 듯하다. 북한의 통미봉남과 대남 적화통일 전략목표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저자세 대북정책으로는 결코 남북관계를 풀 수 없고, 김정은이 남쪽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할 운신 폭만 넓혀줄 것이다. 북한의 핵무력 건설 강행 추진 과정에서 한국은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미국의 반응을 엿보기 위한 ‘간 보기 도발’의 대상일 뿐이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외교·안보적 도전은 국가 존망지사다.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에 놓인 한국엔 더더욱 그렇다. 문 정부는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대북 몰입 외교를 버려야 한다. 국가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동맹 강화와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협력 네트워크 확대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외교·안보 전략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젠 ‘탈북’할 시간이다.

[문화일보, 202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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