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비핵화와 분리된 남북관계 개선은 북핵 부추기는 자충수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한·미·일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일 미국 해군사관학교에서 만나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공조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 검토 작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만든 자리라고 할 수 있다.
2018~19년 싱가포르·하노이·판문점 등에서 미·북, 남·북, 남·북·미 정상의 만남이 이루어져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졌을 때 대북 정책 공조의 중심축은 한·미였다. 그러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는데도 이를 방기한 채 자신의 방식대로 북핵 문제를 다루다 별 소득 없이 끝났다. 이제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한·미·일 안보 협력이 강조되면서 북핵 문제가 한·미·일 3국을 매개로 다뤄질 전망이다. 여기엔 지난해 말부터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한 문재인 정부의 태도 변화도 일조를 했다.
이달 중 미국의 대북 정책 검토 작업 종료와 함께 북한 핵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나가는 데 있어 한·미·일 공조의 핵심은 협상 원칙과 방법이다. 북한 비핵화에 대한 포괄적 합의, 즉 어떤 조건으로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어떻게 비핵화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개략적 로드맵이 나와야 한다. 2018년 6월 미·북 싱가포르 합의를 보면 미·북 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 순으로 기술이 되어 있다. 북한은 이를 포괄적 합의로 봄과 동시에 세 가지 사항의 기술 순서를 (미국은 동의하지 않지만) 비핵화 로드맵으로 간주했다. 북한 입장에 공감한 문재인 정부는 평화체제 구축의 시발점을 (6·25 전쟁) 종전선언이라고 보고 북한이 일부 핵 시설을 폐기하고 (남·북·미·중 간) 종전선언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예상과 달리 영변 핵 시설 폐기와 경제 제재 해제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 영변 외에도 여러 곳에 가동 중이거나 은닉된 핵 시설과 핵 물질 등을 고려할 때 영변 핵 시설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경제 제재의 고통을 실감한 김정은은 종전선언 대신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해제는 상호 등가성(等價性)이 없다고 판단한 트럼프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이를 거절했다.
미·북 하노이 회담 2주년이 다 되어가는 현시점에 여전히 북한 입장이 불변이라면 한·미·일이 북한과 빅딜(포괄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스몰딜(부분적 합의)도 쉽지 않다. 바이든 행정부 관계자들 상당수는 빅딜 이전에 북한 핵 프로그램이 계속 가동 중이므로 비핵화 포괄 합의 이전에 우선 북핵을 동결(중단)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핵 동결이 최종 목표만 아니라면 맞는 얘기다. 문제는 핵 동결에 대해 어떠한 반대급부를 줄 것이냐다. 제재 해제나 완화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2017년 이후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들은 북한의 광물·수산물·섬유제품 수출 금지, 대북 원유 수출 상한제 적용, 북한의 해외 노동자 송환 등 북한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핵심적 조치를 담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핵 개발로 되돌아갈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 만한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하기 전까진 이러한 핵심 제재를 해제해선 안 된다. 이번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 직후 백악관이 발표한 언론 성명(press statement)도 유엔 안보리 결의의 완전한 이행에 합의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유엔의 잘 정비된 대북 경제 제재에 변화를 주는 대신 상당한 분량의 인도적 대북 지원을 핵 동결에 대한 반대급부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북한과의 포괄적 합의와 로드맵 협상은 끈기를 가지고 해나가야 한다.
여기서 가장 유의해야 할 대목은 바로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남북 관계와 비핵화 협상의 선순환이다. 북한 비핵화 협상과 별도로 남북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 시너지 효과를 내자는 얘기인데, 자칫 북한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한·미·일 대북 공조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약한 고리가 한국이라는 판단이 가능해진다. 북핵 문제의 최대 당사자인 한국이 비핵화 협상이 잘 안 되면 남북 관계라도 개선해보자는 식이 된다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만들어주는데 사실상 우리가 앞장서는 셈이 된다.
마지막으로,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 말처럼 이번 한·미·일 회담이 ‘전략적 소통’의 기회였다면 미국의 대북 정책 검토 작업의 일환으로 한·미·일이 북한 핵·미사일을 억제하고 방어할 수 있는 방안에 관해서도 긴밀한 협의가 뒤따라야 한다. 북한 탄도미사일 공격 징후를 사전에 탐지하고 파괴할 수 있는 능력, 탄도미사일이 발사되었을 때 이를 방어할 중층적 요격 체계는 한·미·일의 정보 자산 협력이 이루어질 때 훨씬 더 견고해질 수 있다. 북한 미사일 대응 체계의 핵심은 공중에서 북한 무기 체계의 움직임을 24시간 탐지할 수 있는 감시·정찰 능력이다. 우리의 독자적 감시·정찰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현실을 고려할 때 미국과 일본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다. 일본과의 역사 문제나 미국과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는 별도로 다뤄 나가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철저한 방어 체제를 한·미·일 중심으로 강화하는 것은 백번 옳은 선택이다.
[중앙일보, 2021-04-07]
https://news.joins.com/article/24029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