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협력적 동아시아 질서 구축 위해 쿼드 플러스참여해야

신각수 주일대사

 

조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4년간 손상된 세계 지도력 회복을 위해 발 빠른 외교를 펼치고 있다. 첫 쿼드(··인도·호주 협의체)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한·일과의 2+2회담, ·중 고위급 대화, ·일 정상회담, 기후변화정상회의로 이어진 외교 행보는 잘 연출된 전격전을 보는 듯하다. 목표는 중층적 압박을 통해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세련된 방식으로 동맹, 다자주의, 가치 외교를 적절히 활용하는 대중 복합 전략을 구사한다. 기본적으로 경쟁이 불가피하지만, 협력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협력하면서 사안에 따라 대립도 불사한다는 자세다. 중국도 중간 지대라 생각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왕이 외교부장의 중동 방문, 한국·동남아 4국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맞불을 놓으며 미·중 외교전이 치열하다. ·중 격돌 심화로 인한 복합 전환기의 소용돌이가 본격화하며, 과거처럼 담장 위에서 모호성의 이익을 누릴 여유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외교의 방향타를 제대로 잡으려면 동아시아 질서가 어떻게 변모하고 우리에게 바람직한 건 어떤 형태인지 큰 그림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6개 시나리오를 전제로 가능성·요건·전망을 살펴본다.

 

첫째,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동아시아에서 계속 유지되는 미국 주도 질서(Pax Americana) 3.0이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승리와 압도적 국력을 배경으로 패권 국가로서 설계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는 냉전을 승리로 이끌고(Pax Americana 1.0), 이후 20여년간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국제 질서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Pax Americana 2.0).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미국 경제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2010년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된 중국의 부상이 가속하면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됐다. 특히 코로나19 대응 실패는 미국의 상대적 퇴조를 더욱 부각했다. 미국 경제가 백신 접종으로 빨리 회복된다 하더라도 중국 경제가 경착륙하지 않는 한 지난 70년간 미국이 누려온 우위를 독점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미·중 전략 경쟁 과정에서 중국이 고속 성장의 후유증과 권위주의 체제로 인한 다양한 경제·사회 문제로 정체되는 가운데 미국과 동맹국·협력국이 대중 우위를 회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둘째, ·중 협치(Condominium) 질서(Pax Americhina). 패권 국가 영국이 20세기 초 쇠락하는 과정에서 패권 유지를 위해 미국·일본과 세계를 나누어 지배하려 했던 구상과 비슷하다. 중국은 시진핑 시대 초기 신형 대국 관계의 형태로 태평양을 동서로 구분하여 미·중 양국이 분할·관장하는 구상을 미국에 제시했으나, 미국은 이 구상이 동아시아를 중국 세력권으로 만들려 한다는 이유에서 거부했다. 양국의 상반된 가치 체계와 전략적 이해 충돌에 비추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할 것이다. 미국이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나, 천안문 사태 제재 해제 때 일본과 협의 없이 진행했던 아픈 경험을 가진 일본은 미·중 담합 상황에 대한 경계가 크다.

 

셋째, 중국이 미국의 국력을 넘어서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발을 빼는 가운데 일본이 쇠퇴하게 되면 성립될 중국 주도 질서(Pax Sinica). 중국이 미국과 동맹국의 협조에 의한 압력을 극복하고 방대한 국내 시장과 기술 혁신을 발판으로 독자적 순환 체계를 갖춘 대륙 경제와 일대일로를 통한 유라시아 망을 구축하면서, 군사적으로 지역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을 통해 미국 해·공군력의 동아시아 전개를 차단할 수 있게 될 때 가능하다. 2030년대 중반에는 중국이 동아시아 내에서 다른 국가들 전체를 압도하는 힘을 가질 것으로 예상한다는 점에서 배제할 수 없다. 이 상황은 최근 주변국들에 대한 강압적 행태에서 드러나듯 수직적 중화 질서의 부활과 권위주의적 질서를 뜻한다는 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에는 최악이다.

넷째, 역내 주요국들이 공동 참여하는 협력적 질서(Pax Consortia).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CFR) 회장은 최근 포린 어페어스 기고에서 세계 질서를 미국·중국·인도·EU·러시아·일본으로 구성되는 ‘21세기판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를 제안했는데, 이 시나리오는 동아시아 판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지속 관여로 세력 균형이 이뤄지고, 규범에 입각한 지역 질서가 구축되며, 중국이 책임 있는 이해 당사자로 행동해야 실현될 수 있다.

다섯째, ·중을 중심으로 역내가 분열돼 상당 기간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고 매우 불안정한 전략적 현상 유지(Muddle Through). ·중 전략 경쟁 향배가 정해질 때까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전략 환경이 지속하며, 냉전(cold war)보다 긴장 속 평화(cold peace)의 양상을 띠면서 역내 국가들의 불확실성 비용도 증가할 것이다.

 

여섯째, ·중 충돌(Collision)이다. ·중 대립이 격화하면서 지정학적 단층인 대만·남중국해·동중국해에서 충돌 가능성이 있다. 대만은 중국 국내 정치와 연동돼 휘발성이 높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2020년대 중반 충돌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남중국해는 미국의 자유 항행 작전과 중국의 회색 지대 전략 간 충돌, 동중국해는 중·일 영토 분쟁 대상인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싼 충돌 우려가 있다. 동아시아 평화와 안전에 중대한 위협 요인이다.

동아시아 질서가 복합 대전환의 소용돌이에 빠지면서 전략 환경을 직접 주도할 능력이 없는 중견 국가 한국의 대외 전략을 마련하는 건 간단치 않다. 우리의 가치·국익에 부합하는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국가 전략을 세워 실행하되, 상황 변화에 적응할 탄력성(resilience)을 지녀야 한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동아시아는 유럽과 달리 세력 균형이 어려운 지정학 구조다. 유럽은 유럽연합(EU)으로 지역 통합이 심화했고, 미국도 참여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지역 안보를 확보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는 중국이 나머지 국가를 능가하는 압도적 존재이고, 지역 체제가 미약해 역외 세력인 미국의 관여 없이는 세력 균형이 어렵다.

둘째, ·중 경제 순위가 역전된다고 패권이 이동하는 건 아니어서 국부를 고려한 종합 국력의 추이가 주요 변수다. 또 군사력, 소프트파워, 동맹, 에너지, 기축 통화, 지리 등에서 미국이 훨씬 유리하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미국 패권이 상당 기간 지속할 것이다. 다만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역내라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미국과 대등하게 경쟁해 불안정은 증가할 것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대외 의존도가 높고 통일을 지향하는 분단국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헌법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지역 질서가 구축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에게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협력적 질서다. 그래야 중견국의 역할과 전략 공간이 확보된다. 다만 미국 관여, 중층적 지역 질서 구축, 중국의 질서 존중이라는 요건을 충족하는 게 쉽지 않아 실현되기까지 험로가 예상된다. 미국 주도 시나리오는 한국의 평화·번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나, 미국 경제 부활과 중국 경제 쇠퇴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다. 피해야 할 시나리오는 미·중 충돌이고,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은 중국 주도 질서다.

우리는 협력적 지역 질서 구축이나 미국 주도 질서의 부활을 목표로 할 필요가 있다. ·중 충돌이나 중국 주도 질서가 현실화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나타날 전략적 현상 유지 상황에 잘 대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질서를 지향하는 일원으로서 쿼드 플러스에 참여해 역내 평화·번영을 이끌어 협력적 질서를 만들어가야 한다. 캐나다·동남아 등과도 3·소다자 협력 제도를 만들어 제3의 공간을 찾음으로써 규범에 근거한 포용적 지역 질서 구축에 힘쓸 필요가 있다. 일본이 영국·프랑스·독일과 2+2(외교·국방) 회담을 개최하듯 유럽 주요국과 긴밀한 협조를 꾀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관여적 자세로 우리의 전략 가치를 높여 미·중 대립 속 독자 전략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중앙일보, 2021-05-12]

https://news.joins.com/article/24055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