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호르무즈 파병 왜 필요한가?
- 천영우(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前 외교안보수석)
중동 전쟁이 발발한 지 8개월째 접어들었지만 미국과 이란 간 종전협상은 겉돌고 있고, 그 사이에 전쟁의 불길은 걸프 지역에서 홍해 일대로 번지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구를 뭉개 왔으나 이제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처지로 몰린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전쟁에 관여하거나 개입하는 파병은 없다”면서도 아덴만에 파견된 청해부대를 강화하는 방안을 언급했다. 파병이 내키지는 않지만 한미 관계의 파국을 막기 위해 미국에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하겠다는 의향으로 비친다.
한미 관계를 위해 파병하는 것은 명분이 궁색하다. 중동 전쟁은 트럼프가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사주를 받아 감행한 불법·무도한 침략 전쟁이다. 동맹이라는 이유로 트럼프가 저지른 오판과 실패의 ‘오물’을 치우는 데 끌려 들어가는 듯한 모양새는 자칫 국내 반미 세력의 입지를 넓히고 국론 분열을 조장할 위험도 있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다고 한·미 간 제반 현안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풀린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 파병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정상회담 팩트시트를 파기한다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다.
상업성이 희박한 사업에 거금 3500억달러(약 470조원)의 투자를 강요당한 것은 만만한 동맹국에 대한 수탈이나 다름없다. 그 대가로 약속받은 원자력 협력은 향후 양국에서 정권이 두 번 바뀌어도 실현 여부가 불확실한 약속어음에 불과할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농축 능력을 개발하면 굳이 미국에 신세 질 필요도 없다. 이런 동맹국을 위해 무력충돌 위험을 감수하고 파병하겠다면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동맹이 아니라 우리의 사활적 국익을 중심에 두고 접근한다면 결론은 완전히 달라진다. 한국은 매년 약 10억 배럴의 원유를 수입하는 세계 5대 원유 수입국이고, 그중 70% 이상(2025년 기준)을 중동에 의존한다. 중동 원유의 수송로가 막히고 이를 대체할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국경제는 질식을 면할 수 없다.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경제의 명줄이자 급소이고, 국제법상 보장된 해협 통항의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사활적 국익을 지키는 것이다. 당사국 간 협상을 통해 전쟁이 종식되고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이 정상화되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기에는 에너지 안보 차원의 리스크가 너무 크다. 우리 경제의 운명을 요행에 맡겨둘 수 없다면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정상화에 힘을 보태야 한다.
지난 7개월간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있는 동안에도 국제 원유 시장이 수급 대란을 피하고 국제 유가도 배럴당 70~125달러(브렌트유) 선에서 유지된 데는 몇 가지 예외적 요인이 작용했다. 그중에서도 사우디와 UAE가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여 홍해 얀부 항과 오만만의 푸자이라 항으로 연결되는 송유관을 각각 건설해 둔 것이 시장의 충격을 완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쟁 이전 하루 평균 약 20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해 온 걸프 연안국들이 전쟁 중에도 하루 1300만 배럴의 수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개의 우회 송유관 덕분이다. 중국이 원유 수입을 일 1100만 배럴에서 700만 배럴로 400만 배럴이나 감축하고, 국제에너지기구(IEA) 주도로 회원국들이 비축유 긴급 방출에 공조한 것도 시장의 안정에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최근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의 후티 반군이 홍해 연안과 바브엘만데브 해협 입구의 도서 지역까지 장악하고 사우디의 송유관과 유조선을 공격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루 800만 배럴에 달하던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한 사우디의 원유 수출조차 위태롭게 된 것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이고 일본도 중동 원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만, 원유 수입의 30% 이상이 사우디에 편중된 한국만큼 절박한 나라는 없다. 중국은 14억 배럴의 원유를 비축하고 있고, 러시아라는 대체 공급원이 있다. 일본은 한국의 2배가 넘는 경제 규모에도 불구하고 원유 수입량은 우리보다 적고, 가동 중단한 원전 21기 중 11기는 당장 재가동이 가능하다.
외교력만으로 이란이나 후티 반군의 한국 유조선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다면 파병을 서두르는 것이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 있는 자세다. 기왕 파병할 바에는 미국의 작전을 지원할 자산보다 우리 선단을 보호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자산을 보내야 한다. 해군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 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생명선을 수호할 실력부터 보여줘야 한다.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에선 에너지 안보가 바로 국가 안보다.
[조선일보, 2026-10-06]
https://www.chosun.com/opinion/chosun_column/2026/10/06/SHQ25WIM25FUJHIQQLKAPRGS3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