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외교부 차관

 

북한은 지난 16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차관)을 통해 이른바 리비아 핵폐기 방식을 비난하고 미국과의 정상회담 취소를 위협하는 특유의 벼랑끝 전술을 동원했다. 김 부상은 특히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롯한 미국 고위관리들의 선() 핵폐기 후() 보상,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화학무기까지 포함한 폐기 요구 등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1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리비아 모델은 생각하는 모델이 전혀 아니다고 화답했다. 그는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한다면 체제를 보장하고 한국을 본보기로 삼아 잘 살게 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카다피 모델은 (리비아에 대한) 완전 초토화였다. 만약 (비핵화)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그(리비아) 모델이 출현할 것이다고 했다. 말로는 리비아 모델을 부정했지만, 실제로는 리비아 모델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미·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원칙에 반대할 의사가 없는 이상 리비아 모델은 단기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

 

볼턴 보좌관이 말한 리비아 모델의 핵심은 선 핵폐기, 후 보상이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비핵화 수용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이 비핵화의 조건으로 내세운 군사적 위협 제거와 체제보장 중에서 체제보장을 약속했다. 이제 북한은 군사적 위협 제거를 위한 구체적 답변을 미국에 요구할 것이다. 더욱이 중국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공세적 태도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오는 6 12일 미·북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개최되더라도 단기적 성공, 중장기적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 정상회담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 비핵화와 군사적 위협 제거 및 체제보장을 맞바꾸는 역사적 합의에 이를 것이다. 대북(對北) 제재 완화를 시사하는 단계적·동시적 주고받기에 합의하면 리비아 모델은 달나라 얘기처럼 들리게 된다. 합의 내용이 매우 추상적이어서 후속 회담이 불가피할 것이다.

 

추상적 합의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은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비핵화 이행 단계마다 공전(空轉)을 거듭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비핵화가 북한 비핵화와 달리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제거를 포함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대북 군사적 위협 제거가 결국은 주한미군의 지위와 한·미 동맹의 존속 여부와 직결되는 사안이라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맞바꾸는 게 우리의 바람이지만, 북한이 생각하는 평화체제는 미·북 평화협정 체결이 쟁점으로 부상할 것이다.

 

북한이 대화 테이블로 나오게 된 것은 중국의 성실한 유엔안보리 제재 결의 이행, 미국의 대북 군사력 사용 위협, 그리고 우리 정부의 대북 설득과 압박이 합쳐진 결과다. 최근 이 세 가지 전선에 이상기류가 생기고 있다. ‘차이나 패싱을 염려한 중국의 대북 접근, 11월 중간선거에 미·북 정상회담을 이용하고 싶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략적 사고, ·북 정상회담의 단기적 성공을 남북관계 개선에 활용하고 싶은 우리 정부의 조급함이 합쳐질 경우 북핵(北核) 폐기를 통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은 더욱 더 요원해질 것이다. 22일 한·미 정상회담이 이러한 이상기류를 차단하는 만남이 되길 기대한다.

 

[문화일보, 2018-05-2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521010731110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