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지소미아 폐기는 反日 넘어 反美 선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공언한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일본 정부는 7월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에 이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재래식 무기에 대한 ‘캐치올(Catch-All)’ 규제가 한국에 도입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캐치올 규제란 핵무기나 탄도미사일 등 대량파괴무기 생산에 활용될 여지가 있을 경우 수출 금지 품목이 아니더라도 수출을 제한하는 규제를 말한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1994년과 2000년에, 일본은 2002년, 한국은 2003년에 도입했다. 이를 잘 아는 일본 정부가 한국의 캐치올 규제를 문제 삼는 것은 사실과 배치된다.

이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경우 한국을 더 이상 ‘안보 우방국’으로 대우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이 한국을 안보 우방국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한국이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유지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여당 일각에서 지소미아 폐기를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런 단순논리로 접근하면 우리 국익에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려는 진짜 이유는 캐치올 규제가 아니라 위안부 합의와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 입장과 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안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가 이런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해 지소미아 폐기로 대응할 경우 동맹국인 미국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다. 미국은 한·미 동맹을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 속에서 운용하고 평가한다. 과거 박근혜 정부 초기에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 갈등하면서 한·미 관계만 좋으면 미국이 우리 편을 들어줄 것으로 착각하고 워싱턴에서 치열한 로비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의 보이지 않는 ‘중재’가 작동하는 가운데 2015년 12월에 개운치 않은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뤄졌고, 뒤이어 (한·미·일 안보협력의 약한 고리를 보완하려는)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2016년 11월 지소미아를 맺게 됐다. 이런 배경을 무시한 채 지소미아 폐기로 대응할 경우 더 이상 한·미·일 안보협력을 하지 않겠다는 얘기가 된다. 미국은 이를 한국이 한·미 동맹을 재검토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집권 여당이 내년 총선을 반일(反日)을 넘어 반미(反美) 코드로 치르겠다는 선언이 될 것이다.

우리는 피해자지만 일본보다 도덕적·전략적으로 우위에 서야 한다. 우선 자유민주주의국가 간에 통용되는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정치문제를 경제로, 경제문제를 안보조치로 보복하고 압박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 그리고 강제징용문제에 대해서도 한·일 기업 차원을 넘어 우리 정부의 성의와 책임감을 보여줘야 한다. 여러 가지 옵션에 대해 융통성 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해 안보 우방국으로서의 신의를 저버리더라도 지소미아는 유지될 것이고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일 안보협력은 지속돼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오늘 한·일, 한·미,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의 지지와 미국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다.

[문화일보, 2019-8-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01010731110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