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與 "볼턴 경질, 北에 좋은 메시지"... 전문가들 "한국 역할 축소될 것"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前 국립외교원장),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10일(현지 시각) 트위터를 통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경질 사실을 전격적으로 알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주 중 새 보좌관을 임명하겠다고 했다. 최근 미·북 간 대화 움직임이 나타난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 내 대표적 대북 강경파인 볼턴 보좌관이 경질된 것이다. 이에 여권에서는 "미국과 북한간의 대화가 한층 힘을 받게 됐다"는 말이 나왔다. 볼턴 보좌관의 후임이 누구냐에 따라 과거 맥매스터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교체 이후 뜸해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미측 대화 라인이 다시 활기를 띨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볼턴 보좌관 낙마로 인해 올해 들어서만 10차례 미사일을 발사하며 도발을 노골화하는 북한에 대한 '통제 장치'가 유명무실해 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전문가들은 미국 행정부 내에서 대북 정책과 관련한 힘이 대화파로 이동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자칫 '비핵화 협상'이 아닌 북한의 '핵 보유 협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놨다. 내년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동결·폐기 등을 전제로 완전한 비핵화보다는 현상 유지 차원에서 북한과 협상을 타결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급물살을 타면 '한반도 중재자'를 자처한 우리의 역할이 크게 축소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여권에선 이날 볼턴 보좌관이 백악관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등을 비판해온 대북 강경파란 점에서 "그의 해임으로 미·북 비핵화 실무협상에 다시 속도가 붙는 것 아니냐"는 기대의 말들이 나왔다. 북한도 볼턴을 적대시해온 만큼 대화 재개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라디오 인터뷰에서 "(볼턴의 해임은) 당연히 북한한테는 좋은 메시지"라고 했다. 그는 협상을 이른바 '빅딜' 방식으로 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고 본다며 "볼턴 방식이 결국 '리비아 방식'인데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미국 정부 내에서도 인식이 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정 수석부의장은 '하노이 노딜' 직후인 지난 3월 볼턴 보좌관에 대해 "매우 재수 없는 사람" "인디언을 죽이면서 양심의 가책 없이 잘했다고 하는 백인 기병대장이 생각난다"고 했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볼턴 보좌관 경질 관련 질문에 "우리 정부가 이야기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 문 대통령도 추석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대북·대미 메시지를 내놓을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여권에서는 "최근 미·북 간에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확고한 대화 의지를 보여준 것"이란 말도 나왔다. 북한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지난 9일 담화에서 "우리는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국 측과 마주 앉아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온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도 9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 선거 유세장으로 떠나기 전 기자들과 만나 "북한과 관련해 방금 나온 성명을 봤다. 그것은 흥미로울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 보좌관의 경질을 전격 결정했다.

볼턴 전 보좌관은 지난해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핵폐기 방식으로 '선(先) 핵폐기, 후(後) 보상'의 이른바 '리비아 모델'을 공개 주장하는 등 대북 압박을 주도했다. 지난 2월 하노이 2차 정상회담 때도 일괄타결 방식의 '빅딜'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볼턴 전 보좌관의 퇴장을 북측이 반길 공산이 크다고 관측했다. 김형석 전 통일부 차관은 "북한은 (대화 지연의) 장본인으로 볼턴 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지목해왔다"며 "(미국은) 볼턴과 폼페이오를 둘 다 교체할 수 없으니, 볼턴을 교체해서 북한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보낸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김 전 차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의) 속도를 내겠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북한에게 이 정도로 체면을 세워줬으니 (이제는) '너희가 양보해라'라고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볼턴 경질로 '트럼프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외교안보팀을 자주 바꾸는 성향으로, 참모에 대한 신뢰가 없이 (혼자) 다 결정하는 리더십"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독주를 제어하는 일련의 전략가 관료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다 충성파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도 "미 대선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외교 안보 관련) 명망가가 올 가능성은 별로 없고, 말을 잘 듣는 실무형 인사가 올 가능성이 크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혼자) 뜻에 따라 대북 협상이 좌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런 볼턴 경질이 대북 핵협상의 실질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신범철 센터장은 "미 행정부 내에서 북한에 대한 '유연한 접근' 방식을 상대로 볼턴 전 보좌관이 균형추 역할을 해왔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재선을 위해 '북핵 폐기'라는 근본 문제 해결보다 일정한 타협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했다. 미북 협상이 '비핵화'가 아닌 '핵보유 협상'으로 전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신 센터장은 "지금 상황이 북한에 좀 더 유리한 쪽으로 흘러갈 것"이라며 "북한은 속으로 웃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형석 전 차관은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북한에 적절한 '당근'을 주면, 내년 대선까지 북한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등 미국을 직접 위협할 돌발 행동은 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다고 봤을 수 있다"고 했다.

미국 행정부 내에 '매파'가 사라져 균형추가 상실된 상황에서 미·북 대화가 속도를 낼 경우 미국과 북한이 '중재자'로서 한국을 거치지 않고 1대1로 거래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이 심화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신범철 센터장은 "통미봉남은 이미 더 이상 심화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볼턴 보좌관 경질 이후) 계속 지속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북한은 우리 정부를 압박하면서 미 행정부를 설득하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던질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미·북 실무협상을 앞둔 상황에서도 우리 정부를 향해 "남조선 당국자들과는 말해봤댔자 시간 낭비"라면서 우리의 대화 의지를 "겁먹은 개" "삶은 소대가리" 등의 험한 말로 깎아내리며 미사일·방사포 도발을 감행해왔다는 것이다.

[조선일보, 2019-9-1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11/201909110136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