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정권 관계없이 일관된 동방정책이 베를린장벽 허물어”

이 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최정호 연세대 명예교수, 페트라 지그문트 독일 외무부 국장, 이은정 베를린자유대 교수, 김영배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 김황식 전 총리, 김효준 BMW코리아 회장,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 교수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 11월 9일) 30주년을 한 달여 앞둔 지난 19일 시내 이스트사이드갤러리, 체크포인트 찰리, 장벽박물관 등에는 많은 시민과 국내외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각종 기념행사가 장벽과 관련된 곳곳에서 열리면서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날 분데스타크(연방하원) 파울뢰베하우스의 오이로파잘에서는 한독포럼이 개최돼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90년 10월 3일)의 경험과 교훈에 대해 열띤 논의가 벌어졌다.

하르트무트 코쉬크 전 독일연방하원의원은 “장벽 붕괴 30년을 맞아 독일인들은 환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일이 정말 성공인지를 돌이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코쉬크 전 의원은 “그동안 신연방주(옛 동독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많이 기울이지 않았다는 자성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냉전종식 기념행사 성대하게 열려

최근 동독 지역에 속했던 작센주와 브란덴부르크주에서 실시된 주의회 선거에서는 극우성향의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제2당으로 급부상했다. 옛 동독지역의 경제가 여전히 옛 서독지역에 비해 낙후된 데 대한 불만 등이 반영돼 특히 옛 동독지역에서 AfD가 득세하게 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장벽붕괴가 이듬해 독일통일로 이어진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한독포럼 공동의장인 이근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뤄낸 독일 통일, 포용과 혁신으로 만들어 낸 동서독 사회통합은 한국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며 “상호 존중에 바탕을 둔 평화협력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워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또 “독일 국민들은 상호 간 축적된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통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며 “독일은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추고 때로는 국제사회를 설득해 안보를 확보하고 양독관계에 대한 지지를 보장받았다”고 강조했다.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독일은 1969년 집권한 사민당 빌리 브란트 정부가 추구한 동방정책을 정권이 바뀌어도 중단 없이 20년간 지속해 결국 동독 주민들이 서독과의 통일에 찬성하도록 만들어 구심력을 최대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윤 전 장관은 “독일은 장벽 붕괴 후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능란한 외교를 통해 통일을 반대하는 주변 국가들의 마음을 돌려 원심력을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유럽의 독일화’가 아니라 ‘독일의 유럽화’를 추구한 것이 주변 국가들을 안심시키는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윤 전 장관은 “독일은 원심력 약화, 구심력 강화, 지역 협력이라는 3가지 과제를 달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를 둘러싼 4국 간에는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원심력이 작동하고 있다”며 “남북 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과 통일을 원하는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이러한 원심력을 약화시키는 외교전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정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동방정책은 동서독과 동서유럽 경계선을 서로 넘나들 수 있는 경계선으로 탈바꿈시켰다”며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이 예상보다 빨리 큰 변화가 일어나게 했으며 그 결과가 바로 베를린장벽 붕괴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페트라 지그문트 독일 외무부 국장은 “남북관계 발전과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양국 정부 차원은 물론 시민단체들까지도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은정 베를린자유대 교수는 “독일은 남북한의 ‘접근을 통한 변화’의 차원에서 북한 학생 초청 등 프로그램에 적극 나서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영배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발표한 신한반도체제 구상은 반세기 전 베를린장벽을 넘어 소련 및 동구권과의 화해협력을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전 유럽의 평화적 질서 창출을 염두에 두었던 에곤 바르 전 경제협력부 장관의 동방정책 기본구상과도 매우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웃 국가 간의 관계 정립과 지역 협력에 대한 독일의 경험과 한국의 도전 과제도 진지하게 논의됐다. 게르하르트 자바틸 전 주한 EU 대사는 “세계 어떤 지역에서도 이웃 간 협력이 동북아시아처럼 부족한 곳이 없다”며 “독일은 국가 간 협업 부문에서 챔피언이 됐는데 아시아 국가들도 정치적으로 낙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임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남북한 ‘접근을 통한 변화’ 나서야

김황식 전 총리는 “독일과 인접 국가들이 진정한 사죄와 용서를 통해 과거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과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 갈등은 참으로 안타깝다”며 “독일과 유럽의 경험과 지혜에서 배우고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효준 BMW코리아 회장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수입선 다변화와 국산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했다”며 “일본이 가진 부품 소재 기술 상당 부분은 독일 기업이 원천 기술 갖고 있어 한·독 간 협력이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한독포럼에서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환경의 발전’에 대해서도 양국 간 협력이 긴밀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 교수는 “빅데이터와 AI 혁명이라는 빅체인지는 규모가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영토와 시장이 큰 중국이 가장 유리하다”며 “미국도 과학연구에서 가장 자유로워 경쟁력이 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한국과 독일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데 서로 보완적인 산업 기반을 가지고 있어 협력 가능성이 크다”고 제안했다.

[중앙 SUNDAY, 2019-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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