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인도·태평양전략 소극적 참여는 한국의 전략 입지 좁힌다

신각수 前 주일대사

동아시아 세력 전환과 한국의 국익

2020년대는 초불확실성과 초연결성 시대다. 세계화·정보화로 국제사회의 초연결성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지도적 역할 방기로 국제 질서가 흔들리면서 초불확실성이 자리 잡았다. 지난 70여년 냉전과 탈냉전 시대에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 속에서 괄목할 만한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금융자본주의 미국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주춤하는 동안 개혁 정책 이후 연평균 10%대 성장을 질주한 중국의 부상으로 동아시아 지역 질서에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 참여 요청에 대해 초기에는 청와대의 사실상 반대 입장과 외교부의 긍정적 태도로 혼선을 빚었다. 지난해 말에야 신남방정책과 접목하는 선에서 부분적 참여로 선회했다. 이런 소극적 자세는 인도·태평양전략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이를 중국 봉쇄정책으로 보아 중국과 마찰을 빚지 않을까 염려한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도·태평양전략은 중국의 부상으로 변화하게 될 향후 동아시아 질서를 형성하는 역내 주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보다 능동적으로 우리 역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 유지·발전시켜야

첫째, 인도·태평양전략은 외교·군사·경제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돼 있고, 미·중 경쟁도 양자선택 게임(binary game)이라기보다는 복합계의 모습에 가깝다. 따라서 이 전략 안에서 우리가 취할 선택은 사안별로 다양한 조합이 될 것이며 우리 국익·가치·원칙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사안이다.

둘째, 인도·태평양전략은 동아시아 세력 전환 과정을 통해 형성될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의 근본 가치로서 ‘자유와 개방(free and open)’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한국의 가치나 국가 전략과 부합된다. 지난 70년 우리가 이룩한 경제 발전과 민주화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기반 위에서 가능했고 앞으로도 이를 유지·발전시켜 나가는 데 외교력을 모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도 인도·태평양전략을 플랫폼으로 간주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셋째, 인도·태평양전략은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계속 비중이 커질 중국에 대한 우리 외교의 독자적 전략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지렛대로서도 중요하다. 최근 소강상태인 한·중 관계가 보여주듯 한·중 전략적 협력 관계의 모색은 튼튼한 한·미 동맹을 전제로 하는데, 한국의 능동적 참여는 한·미 동맹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 중국이 늘 한·미 동맹의 틈새를 파고들고 있으며 러시아와 함께 동아시아의 전략 공백을 넓히려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넷째, 중국은 지리적으로는 이웃이고 경제적으로는 세계 가치·공급망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중요한 존재다. 그러나 공산당 일당독재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우리와 다른 정치·경제체제를 택하고 있다. 수직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중화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친선혜용(親誠惠容, 친하게 성심껏 혜택을 주며 포용하겠다는 뜻을 담은 시진핑 주석의 외교 노선)의 구호와 어긋나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와 같이 인접국에 강압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구동화이(求同化異, 공동 이익을 추구하되 이견에는 공감대를 확대한다)의 자세로 임하면서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책임 있는 이해 당사국이 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헤징이 필요하다. 인도·태평양전략은 그 수단이 될 수 있다.

다섯째, 향후 미·중 관계는 경쟁이 큰 흐름을 이루겠지만, 협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중 경쟁의 틀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역내 국가들과 함께 완화할 수는 있다. 고유의 국가 발전 자산을 가진 중견 국가로서 다양한 소지역·지역 모임을 통해 가교 구실을 하면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전략의 구현에 힘을 보탤 수 있다.

국익에 맞는 동아시아 질서 추구해야

여섯째, 일본과 호주의 인도·태평양전략에 관한 접근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중국 반발 완화와 동남아 유인을 목적으로 인도·태평양전략을 인도·태평양비전으로 바꿨고, 적극적 역할을 추구하면서 일·중 관계도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보다 대중 경제 의존도가 높은 호주도 인도·태평양전략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우리도 정교한 접근을 통해 전략적 가치를 높이고 미·중 경쟁으로 인한 어려움을 줄여야 한다.

끝으로, 인도·태평양전략은 미국의 동아시아 관여를 지속하게 하는 수단으로도 의미가 있다. 신고립주의와 미국 우선주의는 동아시아에서 전략 공백을 낳고 있다. 동아시아 질서의 안정은 미국의 지속적 관여와 중층적 지역 체제들을 통한 법치의 보장에 달려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도 우리 국익에 맞는 동아시아 질서의 구축을 위해 적극적 자세로 임해야 한다.

우리는 지역 질서의 대전환기에 한반도 문제에 너무 매몰돼 엉거주춤한 자세로 큰 흐름에 비켜있어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당사자로서 확고한 주인의식(ownership)을 갖고 우리 역량에 걸맞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외교 지렛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은 우리 국가 생존의 필수요건이다. 현재의 신남방정책과의 연계를 넘어 보다 포괄적인 외교안보전략 차원에서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전략에 동참해야 한다.

[중앙일보,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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