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격동의 세계 질서, 인도·태평양에 우리의 미래 있어
신각수 (前 주일대사)
인도·태평양 지역은 21세기 세계 경제를 이끌어 나갈 요충지로, 지정학적·지경학적 경쟁의 핵심 무대다. 복합 대전환으로 요동치는 인·태 지역 질서 향배야말로 우리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중요성에 비추어 우리도 명확한 인·태 지역 정책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5년 단위 정권 교체로 외교정책의 연속성이 없고, 중국을 의식한 소극적 태도 탓이다. 전 정부가 북한·중국에 중점을 두다 보니 인·태 지역을 둘러싼 활발한 움직임에서 소외되었다. 새 정부는 적극적 자세이지만, 후발 주자로서 핸디캡을 안고 있다.
우리는 왜 적극적 인·태 지역 정책이 필요할까. 첫째, 우리 외교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대외의존도가 높고 지정학적으로 어려운 한국에 인·태 지역은 평화·번영의 핵심 지역이다. 둘째, 그동안 우리는 안미경중(安美經中)에 맞추려 전략적 모호성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미·중 대립 심화로 전략적 모호성이 혜택을 주기는커녕 양측으로부터 경원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중이 격돌하는 인·태 지역에 관한 우리의 분명한 입장이 한·미 동맹을 공고히 하고 한·중 관계를 관리하는 데 유리해졌다.
인·태 전략은 우리 외교 정체성의 핵심
셋째, 인·태 정책을 세워 집행하는 것이 우리 국익·가치·원칙을 반영한 일관성 있는 외교에 도움이 된다. 인·태 정책이 다변화하는 외교 주체들에게 뚜렷한 외교 목표를 제시해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일관성을 부여해 줄 것이다. 예측성과 안정성이 중요한 민간 기업들에 도움이 된다. 넷째, 인·태 지역은 미국 서해안에서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매우 광범위하고 여러 소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연결성 시대에 인·태 지역을 포괄하는 정책을 통해 지역별로 분절된 정책의 정합성을 높일 수 있다.
다섯째, 한국 외교가 전환하고 있음을 국제사회에 알릴 기제다. 한국 외교의 기축이 북과 서에서 동과 남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끝으로 미국·일본·호주·인도·아세안 등 역내 주요 주체들이 각기 특성에 맞는 인·태 정책을 발표하였고, 역외의 영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유럽연합(EU)도 동참하였는데 정작 인·태 국가인 한국이 인·태 정책이 없다는 건 비정상이다.
이로 인해 한국은 네트워크 시대에 다양한 소다자·다자의 틀에서 소외되었다. 지난달 EU 의회가 대만해협 결의를 채택하면서 인·태 지역 협력 대상으로 일본·호주만을 특정한 것은 인·태 지역에서 우리의 낮은 존재감을 의미한다.
인·태 정책을 가장 먼저 추진한 국가는 일본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집권 1기 때인 2006년 인도 의회 연설에서 인도양과 태평양을 포괄하는 개념을 제시했다. 2012년 재집권 후엔 중국 부상으로 경제력이 역전되고 두 차례의 센카쿠 영토 분쟁에서 과격한 중국 공세를 겪으면서 인·태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자유와 번영의 호, 다이아몬드 안보 구상,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실현, 쿼드 출범 등을 통해 규범에 근거한 자유롭고 열린 인·태 정책으로 구체화하였다.
미국은 동맹과 가치 외교 가속
미국은 오바마 정부가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추구했으나 불충분하였다. 본격적인 인·태 전략은 트럼프 정부에서 2017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연설과 국가안보전략으로 출발하여 2019년 공식 채택하였다. 바이든 정부 들어 2022년 APEC 정책 발표와 쿼드 활성화, 미·영·호 외교안보협의체(AUKUS) 발족, 인·태경제프레임워크(IPEF) 교섭 등을 통해 구체화하였고, 통합 억지, 동맹 중시, 다자주의, 가치외교 등을 결합한 포괄적 정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다만 국내 사정으로 시장 접근을 제외함으로써 경제면에서 약점이 있고, 동남아 경쟁에서 중국에 뒤지고 있다.
경제와 안보 면에서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호주는 2012년 ‘아시아 세기의 호주’ 백서에서 인·태 지역 정책을 밝히면서 경제적 고려에서 대중 관계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남중국해 문제, 중국의 내정 간섭, 중국의 경제 보복 등을 계기로 2016년 방위백서, 2017년 외교백서, 2020년 방위전략개정 등에서 대미 동맹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유럽에서는 EU를 탈퇴한 영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세계로 향한 영국(Global Britain)’ 정책에 따라 2021년 ‘경쟁 시대의 영국: 안보·방위·개발·외교 정책의 통합검토’ 보고서에서 인·태 정책을 구체화하였다. 경제·안보·가치를 3대 중점 분야로 하여 FTA 체결, 공급망 탄력성, 안보방위 협력 강화 등 9개 행동 계획을 마련하였다. 태평양에 영토와 군대가 있는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2021년 ‘프랑스의 인·태 동반자 관계’ 발표를 통해 EU 일원으로 역내 국가들과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 중개 역할을 추구하겠다고 하였다. 독일은 2020년 ‘인·태 지역 정책지침’을 통해 다자주의, EU(프랑스) 협조, 원칙·가치, 무역·해양의 자유, 법치·협력을 내세웠다.
자유·평화·민주주의 등 가치 중시해야
한국의 인·태 정책은 어떤 내용이 되어야 할까. 첫째, 우리 정체성과 국익에 맞추어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한국은 분단국으로 대외의존도가 매우 높고, 민주주의 중견 국가로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혜국이다. 따라서 인·태 지역에서 자유·평화·민주주의·시장경제·법치·인권 등 헌법과 국제법의 가치를 증진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인·태 지역에서 지향하는 지역 질서의 방향과 이를 뒷받침할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태 지역의 평화적 발전에는 미국의 지속적 관여, 중층적 지역 체제를 통한 규범에 근거한 지역 질서의 구축 및 중국을 포함한 지역 국가들의 국제법과 유엔 헌장 존중이 필수다.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뒷받침해온 자유주의 지역 질서의 유지·발전이 목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미·중 갈등이 무력 충돌로 이어지는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게 중요하므로, 힘닿는 데까지 역내외 국가들과 미·중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인·태 정책은 포용성·탄력성·지속성·일관성·연결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원칙과 규범을 지키는 한 모두에게 개방되는 포용성, 복합 위기에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탄력성, 안정성과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지속성, 우리가 추구하는 원칙과 가치에 관한 말과 행동의 일관성, 다양성을 통괄적으로 엮어내는 연결성이 필요하다.
넷째,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반도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로서는 인·태 지역 내 군사력 활용에 제약이 있다. 따라서 인·태 정책의 집행에 한국 경제에 사활적 이익이 걸린 해양의 자유를 위한 해군력 사용은 예외로 해야 하겠지만, 전체적으로는 국력의 다른 요소인 외교·경제·정보의 비중을 늘려야 할 것이다.
다섯째, 강대국 경쟁의 혼돈 속에 국익 실현을 위한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미국의 신고립주의 대두 가능성과 중국의 민족주의적 공세 외교에 대비해야 한다. 여섯째, 비핵화를 포함한 북한 문제도 인·태 정책의 큰 틀에서 역내외 국가들과 함께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지역 전체를 넓게 봄으로써 관련국들과의 유기적 연관 속에 정책을 집행하게 되어 보다 실효적일 것이다.
제한된 자원, 선택과 집중 필수적
일곱째, 중견 국가로서 다자주의에 관한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기후위기, 테러, 의료, 환경, 개발협력, 빈곤 퇴치 등 지역·글로벌 이슈에 관한 인·태 협력에 우리 실정과 능력에 걸맞은 기여와 주도권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사안별로 구성되는 소다자·다자 협력 틀에 참여하거나 직접 구축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꾀해야 한다.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며,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우선하되, 능력을 넘어서는 과욕은 금물이다.
여덟째, 역내 호주·캐나다·인도·인도네시아·베트남·말레이시아·싱가포르·아세안 및 역외 독일·영국·프랑스·EU 등 주요 행위자들과 양자 차원의 밀도 있는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동남아에서는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에 유의해야 하며, 경제적 차원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지속적 접근이 요구된다. 끝으로 우리 경제의 생존에 필수인 자유무역, 항행의 자유 및 경제 보복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해야 한다.
이제 인·태 정책이 우리 국가 전략의 핵심에 와야 한다. 지난 5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집중적 노력이 필요하다. 광범위한 영역이 관련되는 만큼 유기적 정책 입안을 위해 범정부 작업단을 구성하여 임해야 할 것이다. 정책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야당과 학계·시민사회 연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포괄적이고 실효적인 인·태 정책을 통한 글로벌 중추 국가의 목표 달성을 기대한다.
[중앙일보, 2022-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