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文정부 ‘이념적 反美-실용적 反美’ 혼재… 나라운명 흔들수도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장,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 美대사관저 침입 사건으로 본 한·미 동맹

주한 미국대사가 거주하는 관저가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사상 초유의 사건은 동맹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정부의 미온적 대처는 더욱 한·미 동맹의 문제를 드러내게 했다는 평가가 많다. 지난 18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 미 대사관저를 무단 침입해 “해리스 (대사) 떠나라” “(방위비) 분담금 인상 절대 반대한다” “우리 국내 문제에 간섭 말라” “우리는 미군이 필요 없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현장에서 학생과 회원 19명을 체포했고 이 중 4명이 구속됐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는 “고양이들은 무사하다”며 화를 면했음을 알렸지만, 만일 그의 가족이나 외교관의 신상에 위해가 있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1964년 발효된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30조는 “외교사절단의 공관은 불가침이며, 공관장의 관저도 불가침의 보호를 받는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협약에 서명한 국가는 공관 지역을 어떠한 침입이나 손해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공관의 안녕을 교란하거나 품위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 말하자면 정부는 그러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이 모든 주한 외교 공관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할 것을 촉구(urge)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이런 의미다.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시험을 했을 때 유엔이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준수를 ‘촉구(urge)한다’고 할 때와 같은 톤의 용어가 동맹국 사이에 등장한 것이다. 외교적 수사(rhetoric)치고는 상당히 센 발언이다.

이번 사건은 지난 1985년 5월 23∼26일 당시 전국적인 학생운동조직인 ‘삼민투쟁위원회’ 주도 아래 서울대·연대·고대·서강대·성대생 73명이 서울 미 문화원을 기습 점거해 농성을 벌였던 사건과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 당시 이들은 “(1980년 5월)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등 구호를 내붙이고 주한 미 대사와의 면담과 내외신 기자회견 보장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당시 사건은 미국에 한국의 군사정권을 비호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민주화를 염원하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알리려는 일말의 시대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점거 장소도 치외법권이 엄격히 적용되는 주한 미 대사관이나 관저가 아닌 문화원을 택해 치외법권 즉 미 영토를 침범했다는 대외적 비판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리처드 워커 주한 미 대사는 “광주사태는 한국 내의 문제로 미국이 책임질 것이 없다”는 해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미 대사관저 침입 사건은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만들어진 문민정부가 1993년 탄생한 지 25년 이상이 지난 시점에 벌어졌다. 정당하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돼 있는데도 동맹국 공관에 무단 침입해 농성한 것은 명분과 방법에 있어 국민적 공감을 얻기 힘들다. 특히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이제 막 시작된 시점에 미국이 상당한 비용 부담을 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대사관저를 무단 침범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은 이들이 국제관계나 규범에 대한 지식이 매우 일천하거나, 아니면 고도의 전술적 차원에서 사건을 벌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여타 친북 단체와의 조율을 바탕으로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넘어 북한 문제에 관한 미국의 정책을 규탄하고 향후 여론을 ‘민족 공조’와 ‘반미’로 돌리기 위한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미주의’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중적(popular)’ 반미주의. 오늘은 미 대사관 앞 반미 촛불시위에 나가지만 올겨울 미국 여행을 위해 내일은 미 대사관에 비자 받으러 가는 것과 같이, 신념보다는 일시적 감정이나 사회적 흐름에 편승한 반미주의다. 두 번째는 ‘실용적(pragmatic)’ 반미주의. 한·미 관계에서 개선이 가능한 쟁점이 생기면 협상에 힘을 보태주기 위해 미국에 ‘실용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과거 한·미 양국 정부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협상을 할 때 SOFA의 불공정성을 규탄하는 평화적 시위가 광화문에서 벌어진 적이 있는데, 시위대 상당수는 SOFA 개정 협상이 비교적 원만하게 타결되자 (집행부의 생각과 달리) 더 이상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것은 세 번째 유형인 ‘이념적(ideological)’ 반미주의다. 여기에 속한 이들은 미국을 문명사적 관점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간주한다. 이념적 반미주의자에는 ‘신념형’과 ‘위선형’이 있다. 신념형 반미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미국과 가까이할수록 전쟁에 빨려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고 평화가 깨지며 국가의 자율성이 침해받고 정의가 위협받는다고 믿는다. 위선형 반미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미국을 동경해 자식들을 미국에 유학시키면서도 본인은 신념형인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다. 이들은 교육과 조직화 수준이 높으므로 권력을 잡거나 권력 주위에 포진할 경우 나라의 운명을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을 수 있다. 1992년 11월 필리핀 의회는 당시 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1표 차이로 미군 철수를 결정했다. 이념적 반미주의자들이 힘을 합치면 2020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들에게는 남북 분단의 엄중한 현실보다는 주한미군 철수를 노리는 북한 정권의 눈치를 보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와 주요 권력기관을 장악한 집권층 내에는 이념적 반미주의자와 실용적 반미주의자가 혼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북의 미사일 시험발사 국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정책, 2018년 6월의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올해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이어 6월의 판문점 미·북 회동 등 일련의 외교·안보적 사안이 요동칠 때마다 오락가락하며 대미 정책에 혼선을 빚곤 했다. 그러다 최근 미·북 관계에 진척이 없자 이념적 반미주의 세력들이 다시 초조해지는 모양새다.

조국 사태 이후 집권 세력에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은 발등의 불이 됐다. 한국 사회는 둘로 갈라졌고, 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남북관계와 외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집권세력 내부에서 치열한 이념투쟁이 전개되는 흐름도 감지되는 형국이다. 현 정권이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지도 고민 중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정부는 ‘화이트리스트’ 배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중단 선언으로 촉발된 ‘반일’에 이어 방위비 분담금 협상의 불공정성을 트집 잡아 ‘반미’까지 내달릴 것인가. 아니면 “지소미아 종료에도 불구하고 한·미 관계는 업그레이드시킬 것”이라는 청와대의 약속을 지켜낼 것인가. 미국이 신고립주의적 대외정책 속에서도 자신의 패권적 지위를 위협하는 중국의 추격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국제질서의 새로운 판을 짜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집권세력이 “다시는 지지 않는다”며 반일과 반미로 내년 선거를 치른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다.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 모두 한·미 관계의 현주소를 제대로 파악하고 동맹의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장·전 외교부 차관

[문화일보, 2019-10-22]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102201030242000001